우리를 속이는 교묘한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세월이 흘러 커다란 대가를 치른 뒤에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 내 안의 잘못된 믿음을 알아차리고 대항할 방법 말이다. 내 안의 믿음에 더해 타인의 잘못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사회에는 아직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국가적 집단주의는 없어도 거짓선지자들을 섬기는 소규모의 광적인 맹목적인 집단들이 존재한다. 무능한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행위, 사이비 집단의 착취, 알고리즘과 결합해 분노를 자극하는 미디어 환경까지. 현대사회에 너무 많은 거짓 선지자의 지지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거짓선지자들의 믿음이 어떠한 비극을 가지고 오는지 알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을 막고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 그 거짓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정면으로 비판해보고도 싶을 것이고 아예 이들의 존재를 외면해버리고 싶을 수도 있다. 마음속에 답답함이 생기는게 당연하지만 앞서말했든,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매 시대마다 동일한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이 반복되어 온다는 것은 이 비극이 단번에 해결할 절대적인 공식이나 단 하나의 사회적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것을 이야기 한다.
하나의 우주의 법칙, 인과 연인것이다. 세상의 방향과 옳고 그름을 감히 단정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마다 격돌하는 갈등이 존재할 뿐이며, 그 선택이 인류에 비극이었는지 이득이었는지는 결국 후대의 역사가 증명할 몫이다. 권력을 쥔 이들이 늘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사회 전체를 단번에 구원할 시스템적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또 다른 오만일 수 있다. 거창한 사회적 해답에 집착하는 대신, 스스로 완벽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개인의 태도'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여기에 있다.
개인적 차원의 삶의 이정표
사회 전체를 구원할 순 없을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는 대응해 볼 수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역시 나만의 대응책 중 하나다. 인간의 믿음, 그리고 진실과 거짓의 구조를 끝까지 파헤쳐 보며 스스로의 생각을 정돈해 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외에도 몇 가지 삶의 기준을 적용해 보고 있다.
집단에 무비판적으로 속하지 않는다
집단은 언제나 진실과 멀어지기 쉽다. 나는 집단이 축적한 지식체계를 참고할 뿐, 그 집단 자체에 내 영혼을 맡기지는 않는다. 정보를 수용하고 다듬어 오롯이 나의 것으로 만든 뒤 스스로 생각한다. 집단은 우리의 생활양식부터 사상의 뿌리까지 깊게 지배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은 지각하지 않고 근태를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에서는 근태에 연연하지 않는다. 애초에 회사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태도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문화 속에 살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사회인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 진실과 진리를 탐구하며,
그 어떤 선지자나 스승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종교에 의지하지 말라. 과학에 의지하지 말라.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철학에 의지하지 말라. 이 모든 체계는 인간과 지식인들이 갈고닦은 문명화된 인류의 창조물일 뿐이다. 언어로 표현된 지식은 저마다 모순적인 부분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불완전성을 내포한다.
의지하지 말라는 뜻은 그것들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되, "정말로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말했듯, 인생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은 진리를 향해 철학하는 것이며, 매 순간 정직하게 진리를 탐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된 해답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되도록 사랑하라
날카로운 이성을 유지하며 세상의 거짓을 파헤치다 보면, 자칫 타인을 향한 오만과 냉소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비판적 분석의 끝에서 우리가 도달하는 진짜 깨달음은 '나 역시 역사 속 그 어리석은 대중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서늘한 자각이다.
만약 이성이 타인을 단죄하고 편 가르는 도구로만 쓰인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도덕적 자만에 불과하며 결국 거짓 선지자들이 파놓은 혐오의 덫에 다시 걸려드는 길이다. 그렇기에 날카로운 분석 끝에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궁극의 지점은 냉소가 아닌, 인간의 근본적 불완전함에 대한 성찰과 타인을 향한 수용적 사랑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비논리적인 모순들조차 사랑하려 노력해야 한다. 보편적 진리는 결국 사랑밖에 없다.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자세, 타인을 혐오하고 구분 짓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본능을 극복해 낼 때 비로소 인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믿음과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도 어리석은 이들을 용서해달라 기도했던 것처럼, 부처가 분별을 거두고 자비를 전파했던 것처럼,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존재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어리석으며, 깊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해치기도 하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우주의 법칙이며, 도덕적인 상태야말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예외적 상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원래 그러함: 비극과 긍정의 유일한 보편성
평범하게 일상을 나누던 친구의 입에서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 주장들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극적인 말을 서슴지 않게 뱉어내는 것도 요즘 이상하게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답답함과 함께 이상한 피로감이 밀려온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말도 안 되는 주택규제로 주택값이 천정부지로 하늘을 뚫었을 때, 보수 유튜버들과 경제 유튜버들이 경제 이론을 기반으로 퍼붓는 비판에 속이 시원했다. 그 통쾌함에 끌려 자연스럽게 경제 공부를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분노와 도파민의 세계에 깊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런 혐오와 분노가 누군가의 특별히 기괴한 결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일그러진 신념이나 내가 자극에 매몰되었던 시간들, 그리고 지금 내가 맞다고 믿으며 서 있는 이 자리조차도 어쩌면 착각일 수 있다. 인간이란 본래 그런 불완전함을 안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음에 빠져있다가도 끝내 그것을 딛고 넘어설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그 혐오의 자극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던 것처럼, 인류 역시 수많은 비극을 거치면서도 긍정적인 방향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회복해내며 지금의 풍요를 만들어냈다. 나는 인간이 가진 이 긍정적인 힘과 역사를 믿는다.
타인의 삶을 내가 감히 바꿀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설령 그 믿음이 착각일지라도,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것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어리석음에 빠져 비극을 만들면서도, 끝내 삶을 긍정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 나가는 것. 누군가를 단죄하지 않고 인간이 가진 이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 불완전함과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진짜 본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