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검증을 통해 세상의 원리가 설명되는 이 사회에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신의 존재보다는 부존재를 믿으며 살아간다. 거기에 더하여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패한 문제들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며 전도하는 신도들을 보며 기독교라는 집단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들이 섬기는 유일신 ‘하느님’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더하여 세상에 신이 있다면 발생하지 않아야 했을 끔찍한 사건들과 전쟁, 비극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듯 신을 믿어야 할 이유보다 믿지 않을 이유가 더욱 많은 현대 사회에서 목사 팀 켈러의 책 <내가 만든 신>에서는 당신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이라는 신을 섬기고 있다고, 그 우상으로 인해 현대 사회의 수많은 문제와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짚어준다
책 <내가 만든 신>을 토대로 하여 신과 우상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다.
신이라는 존재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인간이 신을 발명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의 신앙에 귀결될 문제다. 그러나 신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신을 신봉하고 그 가르침을 삶의 궤적으로 삼아왔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를 비롯하여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의 오딘 신화, 그리고 하늘과 대지의 신이 갈라지며 세상이 열렸다고 믿는 마오리족의 태고 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은 각자의 신을 섬기며 살아온 것이다.
인간은 신의 신성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타인과 연대하며 살아간다. 나아가 신의 대리자로 추앙받는 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공동체를 이끌고, 대중은 그 권위를 따른다. 이처럼 신앙은 개별 인간의 영성을 넘어 한 문명의 질서와 규범을 규정하는 거대한 기둥으로 작동해 왔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차치하더라도, 신이라는 관념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역사적 궤적을 완전히 지배하고 구성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신의 객관적 존재 여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사실 그 자체다. 결국 인간이 섬겨온 신이란, 인간이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집단을 통합하기 위해 세워 올린 절대적 신념과 가치의 집약체였던 셈이다. 신의 존재를 인간 가치의 집약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이라는 초월적·인격적 개념을 잠시 지워보면, 신의 자리에 위치했던 그것이 곧 우리가 맹신하는 현대의 수많은 신념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추상적 개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신정주의, 왕국과 같은 정치체재부터 시작해 우리 일상의 사랑, 회사, 돈, 가족과 같은 모든 추상적 가치들과 같은 것이라고 평가내릴 수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우리는 신의 존재를 지우고 이와 같은 가치들을 당신의 신으로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매달려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당신의 신입니다." - 마틴 루터 -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과연 신 이외의 이 수많은 추상적 가치가, 당신의 삶 전체를 내맡기고 중심에 두어 섬길 만큼 진정 가치 있는 개념들인가 철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원하지도 않으며 언젠가는 시들고 무너져 내릴 피조물과 관념 따위가,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과 존재론적 안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이는 물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신을 섬긴다는 기독교인들조차 과거 십자군 전쟁의 교인들처럼 잘못된 우상을 섬기고 있다. 신의 이름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무참히 약탈하고 살인했던 십자군처럼,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과오를 가리려는 얄팍한 기복 신앙이 팽배한 것이 잔인한 현실이다.
비단 종교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를 무신론자라 칭하는 일반 대중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돈과 명예, 타인의 인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신격화하고, 그것에 자신과 타인의 존재 가치를 매기며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라도 진실한 신앙과 참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종교인은 단순히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인적 관계를 맺는 관습적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며, 비종교인 역시 세속적 가치나 사회적 성공을 절대화하면서 스스로 우상 숭배와 상관없다고 안위해서도 안 된다. 때로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조차 대중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일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욕망과 집착에 눈이 멀어 가짜 신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신앙이란 현란한 교리적 논리나 정합성을 따지는 데 있지 않다.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거짓 선지자와 잘못된 삶의 우상들을 스스로 깨부수고 극복해 낼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신앙과 존재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피조물과 추상적 가치들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맹목적으로 섬기고 있을까?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인간이자, 최초의 신은 바로 부모님이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신과 같은 존재가 자식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는 각각 부모와 자식을 신으로 삼으며 살아가다 비극을 맞이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자식의 입시 성과를 자신의 구원이라 믿는 부모들은, 그 눈먼 예배를 위해 자식을 쉼 없이 채찍질하며 결국 사지로 내몬다. 실제로 수능 시험 성적이나 전국 석차에 대한 부모의 매질과 가혹한 압박을 견디다 못해 끝내 존속살해라는 파멸에 이른 고등학생의 비극이나, 매년 입시 철마다 성적 비관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청소년들의 잔혹한 현실은 가족을 신성화한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증명한다. 자식이라는 신이 무너지면 부모 자신의 존재 가치도 소멸하기에, 그 집착은 사랑이라는 위선 아래 자녀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반대로 부모라는 신의 그늘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들도 존재한다. 부모의 말씀과 기대를 절대적 율법으로 여기며, 자신의 본질적인 삶을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해 보지 못한 채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인생이다. 가족을 우상화하는 순간, 가장 따뜻해야 할 가정은 서로를 옭아매고 파멸로 이끄는 가장 잔인한 신전이 된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자발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숭배하는 신은 단연 자본이다. 돈은 현대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능을 휘두르는 유일한 전능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건강, 그리고 양심마저 제단 위에 기꺼이 제물로 바친다.
실제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가평 계곡 살인 사건이나 수많은 보험금 청부 살해 사건들은 자본이라는 우상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타락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단면이다. 수억 원의 사망보험금을 노리고 배우자나 부모,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 그리고 가상화폐나 주식 투자 실패로 인해 일가족이 동반 자살이라는 이름의 타살을 선택하는 참사는 자본이라는 신이 요구하는 잔혹한 피의 제사다.
자본이라는 신은 인간의 가치를 통장 잔고와 소유한 자산의 크기로 재단하며, 약자들을 소외시키고 짓밟는 일을 정당화한다. 기도가 아닌 계좌 이체로 평안을 사고, 말씀이 아닌 소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는 이 무서운 기복은 인간의 영혼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든다. 결국 자본을 숭배하는 이들의 결말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다 스스로 파멸하는 탐욕의 지옥뿐이다.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욕망, 즉 권력이라는 우상은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아 타인의 운명을 통제하려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권력은 타인의 의지를 무력화하고 자신의 뜻을 절대적인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선사하며, 인간을 끊임없는 지배욕의 노예로 만든다.
오늘날 일상과 조직 속에서 이 권력의 신을 섬기는 모습은 매우 교묘하게 발현된다. 직장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상위에 서야만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타인을 주도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내가 침해당하거나 버려질 것이라는 근원적 불안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상하 관계의 위계 속에서 타인의 자율성을 억누르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행위, 관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은밀한 조종과 정서적 구속을 서슴지 않는 태도는 모두 현대인이 권력이라는 우상 앞에 바치는 제의다.
권력이 최우선 가치가 되는 순간, 모든 인간관계는 존중과 연대의 영역에서 통제와 수단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나보다 우위에 있는 자는 넘어뜨려야 할 적이 되고,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는 내 지위를 다져줄 도구로만 환원된다. 권력이라는 우상은 자신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쥐면 평안을 얻을 것이라 속이지만, 그 권력의 탑을 쌓아 올릴수록 돌아오는 것은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편집증적인 불안과 극심한 고독뿐이다.
반대로 이러한 권력 중심적 질서 속에서 끝내 인간다운 신의와 연대를 지키려 애쓰는 이들조차 잔혹한 비극을 맞이한다. 타인을 통제와 가해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정직하게 대했던 순수한 호의는 권력 판도 속에서 '약함'이나 '이용하기 좋은 먹잇감'으로 치부되어 무참히 이용당하고 버려지기 일쑤다. 결국 권력이라는 신을 맹종하는 자는 불신 속에 자아를 고립시키고, 그 권력의 판도 속에서 순수한 인간성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자마저 가차 없이 짓밟히고 만다. 권력을 절대적 가치로 삼는 한, 그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참된 안식과 구원은 존재할 수 없다.
같은 사람도 다르게 보는 | 아름다움
피상적인 외적 아름다움 역시 현대인들이 깊이 빠져 있는 강력한 우상이다. 물질화된 이미지와 허상에 불과한 신체적 매력을 절대적 가치로 삼을 때, 인간의 내면은 심각한 영적 불구가 된다.
특히 오늘날 소셜 미디어(SNS)는 아름다움이라는 우상을 보편적으로 예배하는 디지털 신전으로 기능한다. 화면 속 정교하게 가공되고 필터링된 이미지들은 대중에게 연출된 허상을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교리로 주입한다. 사람들은 SNS라는 신전에 자신의 필터링된 육체를 끊임없이 전시하고, 타인의 평가와 '좋아요'라는 구원의 증표에 목을 맨다. 타인에게 비치는 껍데기가 곧 자신의 존재 가치가 되는 이 시스템 속에서, 외모는 단순한 신체적 특성을 넘어 하나의 신분과 계급으로 승격된다.
이 가상의 아름다움을 추종하는 모습은 가학적이고 잔인하다. 미디어가 주입한 기형적이고 불가능한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거식과 성형, 끊임없는 신체 개조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미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가차 없이 혐오하고, 타인의 존엄성을 오직 겉모습의 치수로 재단하며 계급화한다. 동일하게 존엄해야 할 영적 단독자들을 단지 껍데기의 수치와 이미지로 판단하는 일상적 차별은 아름다움이라는 우상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이다.
결국 흐르는 세월 속에서 필연적으로 소멸해 갈 육체의 껍질과 디지털 화면 속 가짜 이미지에 영혼을 저당 잡힌 이들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우상 앞에 일평생을 인질로 잡힌 채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자기 연민 속에서 비참하게 자아를 말살해 갈 뿐이다
타자를 도구화 하는 | 사랑
많은 이들이 사랑을 가장 고결한 가치로 여기지만, 이 역시 우상이 되는 순간 가장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돌변한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독립된 인격으로 대면하는 것이지만, 우상화된 사랑은 상대방을 내 정서적 결핍을 메우는 소유물이자 욕망의 도구로 삼는다.
우리 사회의 관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집착과 구속을 '사랑'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기만하는 기괴한 문화가 팽배해 있다. 상대방의 자유와 개별성을 용납하지 못하고 내 뜻대로 길들이려는 정서적 폭력, 상대를 통해 나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쏟아내는 증오와 위협은 모두 사랑을 신격화한 뒤 찾아오는 비극이다. 타자를 도구로 바라보는 이 이기적인 숭배는 마땅히 살려야 할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를 옭아매는 올가미로 작용한다.
지식과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무한한 편리함과 문명의 진보를 약속하며 신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인간은 스스로의 이성과 성취를 우상으로 삼아 세상을 지배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자만하지만, 도덕적 성찰이 결여된 과학주의의 우상은 인류에게 언제나 가장 잔인한 양면성을 드러낸다.
인류에게 무한한 청정에너지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원자력의 원리가, 일순간에 행성 전체의 생명을 증발시키고 문명을 소거할 수 있는 핵무기라는 파멸의 제단을 구축하는 현실이 바로 그 증거다. 과학적 수단이 지닌 치명적인 위험성은 그 기술 자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지식을 '우상'으로 숭배하며 맹신하는 인간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절대적 교리로 삼는 과학주의는 생명의 고귀한 신비와 영혼의 가치를 한낱 데이터 조각으로 격하시키며, 도덕성이 거세된 차가운 합리성 속에서 스스로를 도살할 도구를 쥐여줄 뿐이다.
이 우상이 개인의 삶에서 발현될 때 나타나는 가장 추악한 양태는 바로 '지적 우월주의'와 '교만'이다.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안다는 얄팍한 이유로 타인을 멸시하고 무시하기 시작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지식이 우상이 되는 순간, 배움은 자신을 낮추는 수양이 아니라 타인을 심판하고 계급을 나누는 권력이 된다. 내가 쥐고 있는 작은 정보와 지식을 절대적 법전으로 삼아, 그것을 지니지 못한 타자의 존엄성마저 가차 없이 깎아내리는 잔인한 무관심이 일상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과 배움의 결정적인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참된 배움은 존재와 세상의 원리를 겸손히 깨닫고, 나의 무지를 고백하며 타자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이다. 반면 지식이 우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인간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아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이 된다. 지식과 과학은 우리가 무릎 꿇고 섬기며 맹종해야 할 주재자가 아니라, 공의와 사랑이라는 보편적 진리 아래 통제하고 다스려야 할 철저한 '도구'에 불과하다. 배움을 숭배로 착각하여 지식의 노예가 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쌓아 올린 지적 상아탑 속에서 결국 스스로 고립되어 파멸하게 된다.
민족성의 잔인함 | 문화/종교
집단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민족성과 문화, 그리고 교조화된 종교는 역사와 현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맹목적인 우상이다. "우리 공동체, 우리 민족의 신념만이 유일하고 우월하다"는 신화는 경계를 벗어난 타자를 철저히 배척하고 악마화하는 광기를 낳는다.
오늘날에도 우리를 뒤흔드는 수많은 이념적 대립, 혐오 문화,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는 민족과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한 결과물이다. 신앙을 선포해야 할 종교 집단조차 자신들의 교리와 진영을 절대화하여 타자를 정죄하는 흉기로 변질되고,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향해 종교적 폭력을 행사하는 비극이 지속된다. 집단의 신념을 신성시할 때 개인의 보편적 양심과 타인을 향한 자비는 마비되며, 정의와 애국이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가장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참극이 자행된다.
우상의 극복과 유일신의 참의미
우리가 마주한 이 모든 비극은 결국 스스로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경배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가족, 자본, 권력, 아름다움, 사랑, 과학, 민족 등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우리에게 참된 구원과 평안을 줄 수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도구화하고, 집착하게 만들며, 끝내 파멸로 이끄는 잔인한 우상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성경이 선포하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은 단순히 종교적인 배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 속에서 신으로 삼고 예배할 가치는 오직 보편적인 진리(하나님)밖에 없다"는 가장 강력하고도 엄중한 선언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가짜 신들을 단호하게 부정하고 깨부술 때, 즉 그 어떤 세상의 우상도 우리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세상에 신으로 삼을 만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의와 사랑이라는 보편적 진리만을 섬길 때, 우리는 비로소 눈먼 신앙에서 벗어나 진실된 신앙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섬기고 있는 신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야 한다. 지금 당신을 끌고 가고 있는 진짜 신은 누구인가.
겉으로는 정건한 신앙인의 옷을 입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돈, 명예, 자식, 혹은 타인의 인정이라는 가짜 신들이 보좌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미 확인했듯,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신으로 모신 이들이 도달한 결말은 오직 자아의 말살과 비극뿐이다. 숭배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면, 구원 또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나를 지배하는 우상의 정체를 직시하고 그 맹목적인 믿음을 스스로 해체해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신과 작별하려는 이들에게 | 내면으로의 철저한 하강
만약 세상의 모든 우상과 신이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외부의 대상을 향한 의존을 완전히 거두어들여야 한다. 철학자 니체는 초월적인 신에게 자신의 구원을 내맡긴 채 무기력하게 의존했던 유럽 문화를 미성숙하다고 탄식하며, 신이라는 외적 구원자 없이 스스로의 내면에서 구원과 삶의 의미를 차근차근 찾아낸 붓다의 존재를 높이 평가했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백 배는 더 현실적이다. 불교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전통을 물려받았으며, '신'이라는 개념은 불교가 출현하기 전에 이미 버려졌다. 불교는 역사상 유일하게 진짜 실증적인 종교다.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구원을 약속하는 외부의 거대한 환상이나 초월적인 스펙터클이 아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이다. 외부의 우상을 모조리 깨부수고 스스로를 온전히 탐구하는 철저한 자기 주체성의 확보, 그것이야말로 신이라는 허상과 완전히 작별하고 스스로 서는 길이다.
참된 신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 편리한 기만과의 결별
반대로 만약 당신이 가짜 우상을 버리고 오직 진실된 참된 신과 함께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누려온 편의주의적 신앙 태도를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십계명의 첫 구절은 역사적으로 유대 민족만을 위한 배타적 선언으로 시작되었다. 신앙이 곧 법이자 정치가 되던 시대에, 힌두교처럼 타자의 신조차 품어내는 포용력과 달리 오직 자신들만의 하나님을 내세운 이 배타성은 유대인이 역사적으로 겪어야 했던 수많은 배척과 미움의 근본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의 등장으로 이 유일신 사상은 혁명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예수는 유일신 하나님의 본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민족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과감히 깨부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를 통해 당시 정결법과 민족주의에 빠져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선을 고발하고, 오히려 배척받던 사마리아인의 실천을 진정한 이웃의 모델로 제시했다. 예수가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 그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우상으로 섬기던 '율법의 권위와 종교적 기득권'이었다. 껍데기뿐인 율법이라는 우상에 눈이 멀어 있던 인간들에게, 오직 보편적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후, 인간은 또다시 기독교라는 제도와 교리 자체를 새로운 우상으로 올려놓았다. 교주의 말이나 거짓 선지자의 가이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십자군 전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정당화했다. 오늘날 뿌리와 역사를 공유하는 듯 보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서 반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섬기는 기독교, 무함마드를 최종 예언자로 숭상하는 이슬람교는 각자의 껍데기 교리와 선지자만을 절대화하며 타자를 배척하는 우상 숭배의 비극을 다르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자리를 채우고, 누군가가 짜놓은 지도자나 교회의 가이드라인을 군말 없이 따라가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패스트푸드 스낵을 사 먹듯 신앙을 편리하게 소비하려는 기만이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가이드만을 무작정 따라가는 길의 끝에는 과거 십자군의 참극이나 세 종교의 반목과 같은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참된 신과 동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은 '자신의 믿음과 안내자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내가 알고 있는 교리가, 내가 드리는 예배가, 내가 가진 신앙적 확신이 나 자신의 탐욕과 무지를 덮기 위한 우상 숭배는 아닌지 치열하게 의심해야 한다. 타인이 제공하는 편안한 울타리를 벗어나, 예수처럼 율법의 껍데기를 깨부수고 스스로 보편적 진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고뇌하는 자만이 참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
결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결단
결국 우상을 깨뜨리고 참된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 준비된 표준 정답이나 친절한 안내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종교적인 자아 탐구의 길을 걸어 스스로 단독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타성적인 기복을 깨부수고 참된 진리만을 섬기는 치열한 신앙의 길을 걸을 것인가.
어느 길을 선택하든 가짜 신들의 달콤한 유혹과 환상을 스스로 깨부수고 온몸으로 자기 삶의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오직 각자의 몫이다. 타인이 만들어 준 편리한 신전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내면의 거짓 선지자들을 처단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상의 사슬을 끊어내고 참된 삶의 본질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