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보편적 진리에 가깝고 스스로가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더 심각한 것은 그 무지조차 자각하지 못하여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지적하면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때문에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기에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생각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 사람들에게 무리를 이끄는 '선지자'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들에게 비전과 방향성을 제시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고 협력하게 만드는 역할이 인간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든 선지자가 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실이나 대중의 삶보다 자신의 영향력을 우선시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존재 또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오늘날의 정치를 돌아보면 이 비극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보수당은 당장 먹고사는 민생을 외면한 채 '부정선거'라는 프레임에 기대어 정치적 수명을 연장하고, 민주당은 시장의 원리와 '기초적인 경제지식을 무시'한 채 이념적 정책을 통해 시민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이 두 정치 집단의 표면적 명분은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같다. 불리한 진실은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대중의 착시를 이용하거나, 오히려 대중이 갈구하는 그 맹목적인 신념을 완벽히 대변하기에 그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타인을 선동하든 대중의 열망에 추대되었든,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확증편향을 동력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종국에는 막대한 비극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그 오판으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일상을 살아내는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양극화된 정치와 극단적인 사회 갈등의 본질은 특정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틀릴 수 있음을 잊은 대중의 과신, 그리고 그 무지와 신념을 자양분 삼아 연명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만들어낸 인류사의 구조적 비극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실보다 신념을, 객관적 진실보다 보고 싶은 환상을 더 맹목적으로 좇게 만드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본질적인 방식, 즉 '믿음'의 구조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왜 믿음을 형성하는가. 왜 사실보다 믿음을 우선하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언제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며, 우리는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가보고자 한다.
어리석은 믿음의 역사와 구조
인간은 크고 작은 믿음을 기반으로 살아간다. 내일 아침에도 눈을 떠서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친구, 가족, 동료가 나를 속이지 않고 호의를 베풀 것이라는 믿음, 언제든지 신용거래를 통해 물건을 살 수 있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을 기반으로 우리는 삶을 구성해나간다. 그리고 그 중 어떤 믿음은 인간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바르게 살면 결국 보상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믿음, 돈이 있으면 인생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등 우리는 이러한 믿음들을 신념이라고 부른다.
신념은 어떠한 생각을 굳게 믿는 정신적 행위다. 이는 그 자체로 개인의 삶의 강력한 이정표가 되며, 때로는 한 개인의 경계를 넘어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백성을 긍휼히 여긴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이 한글 창제로 이어져 백성들에게 글을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준 것처럼, 긍정적인 신념은 인류를 풍요롭게 만든다. 반면에 비뚤어진 인종주의적 신념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히틀러의 나치즘처럼,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신념은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믿는 이 신념이 세상에 어떠한 작용을 할 지 지금 이 순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믿고 따르는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며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지만, 그 믿음이 종국에 축복이 될지 혹은 재앙이 될지는 결국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평가되기 때문이다.
광기로 기록된 역사의 신념들
고대의 잔혹한 인신공양에서부터 중세의 종교적 광기가 낳은 마녀사냥과 종교 전쟁, 근대 제국주의의 독선, 그리고 현대의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잘못된 믿음'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에게 그것은 광기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의롭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가 보여준 이중성이 대표적이다. "하나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본적인 가르침은 외면한 채, 이방인을 사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으라는 레위기의 구절(25장 44-46절)만을 끌어와 노예제를 신의 거룩한 질서로 재해석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노예를 부리는 행위를 지극히 당연한 순리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틀렸을 가능성조차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자신들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인간의 믿음의 행태는 지금의 현대 사회 속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는 최고의 지성과 과학적 사고를 갖추었기에 과거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히틀러의 나치즘을 돌아보며 “어떻게 저런 허황된 사상을 믿을 수 있는가”라며 당시 나치의 광풍에 동조했던 대중을 비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치즘과 같은 과거의 잘못된 사상을 잘못되었다 단호하게 비판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기록을 통해 그들의 믿음의 결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말을 모르고 믿음만을 가졌던 그 당시의 독일사람들에게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배상금을 계기로 발생한 경제위기와 사회 전반에 찌든 패배주의를 극복해 줄 지도자였고, 그가 지목한 유대인들은 선량한 시민의 재산을 고리대금업 등으로 갈취한 악독한 부자들이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진실은 히틀러는 국가의 구원자였고 유대인은 악마와 다름없는 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결과를 알고 있는 시대에서 벗어나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면, 과연 자신만큼은 그 광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그 시대의 평범한 대중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사해 운동과 마오쩌둥의 오만
이처럼 왜곡된 진실과 믿음이 부른 비극은 비단 나치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멀지 않은 시기, 전혀 다른 이념의 탈을 쓴 또 다른 비극이 인류에게 찾아왔다. 바로 중국 공산주의의 중심에 있던 마오쩌둥의 제사해(除四害) 운동'이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참새 소탕 작업은 생태계의 연쇄 붕괴를 초래했고, 결국 최대 4,000만 명에 달하는 대기근이라는 인류사 최악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이 황당하고도 참혹한 비극의 기저에는 '공산주의'라는 굳건한 신념이 도사리고 있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오만한 확신이, 자연의 이치마저 정복할 수 있다는 집단적 맹신을 낳은 것이다.
제사해 운동
물론 현대의 우리는 공산주의를 실패한 정치 체제라며 손쉽게 결론 내릴 수 있지만, 당시 중국 민중의 시선에서 보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국민당 정권과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으로 매일같이 굶어 죽는 이웃을 목격해야 했던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끔찍한 악몽에 불과했다. 모두가 굶주림 없이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약속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에게 유일한 구원이자 거부하기 힘든 눈 앞의 '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눈으로 보고 믿었던 것은 교묘하게 포장된 왜곡된 진실에 불과했고, 그 절박했던 믿음의 결과는 참혹한 절망으로 돌아왔다. 자본주의의 부패를 피하려 했던 선택이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부패와 고통을 불러온 것이다.
이렇듯 나치즘과 공산주의 모두, 당대의 비참한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내던 대중의 시선에서는 오히려 '믿지 않는 편이 어리석은 것' 이라는 의견이 주류 여론이었다.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장 정의롭고 필연적인 선택이라 믿었던 주류의 신념이, 가장 파괴적인 맹목성으로 돌변하는 시점이 역사 속에 존재하던 비극의 서막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들은 지금 이 순간, 스스로 합리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 유효한 경고를 던진다. 수많은 정보와 알고리즘의 비호 아래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현대의 정의와 신념 역시, 먼 훗날의 시선에서는 또 하나의 눈먼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스스로의 믿음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자신이 지닌 신념을 경계하며, 언제나 보편적 진실성을 추구해야만 한다.
집단 동조와 진실의 외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인간의 믿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진실의 여부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늘 진실을 갈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눈앞의 안온함이나 집단이 주는 안정감을 위해 거짓을 방조하곤 한다. 차가운 사실을 직면하기보다는 집단이 믿고 있는 편향된 신념에 동참하는 쪽이 훨씬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류의견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며 나아가 진실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집단속에서 타인이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친구들을 잃거나 해당 집단에서 퇴출당하기 딱 좋은 행동이다. 그렇기에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당신은 1+1의 정답을 알고 있는가? 당연히 2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러나 10명의 사람들을 방안에 넣고 당신을 맨 마지막 순번째로 정답을 말하게 한다음에, 1+1의 정답을 물었을 때 앞에 참가자들이 모두 3이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당연히 2가 정답이죠!” 라고 9명의 의견을 무시한 채 확신을 가지고 정답을 외칠 수 있을 것인가? 1955년에 진행된 애시의 동조실험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사람의 대답은 아쉽게도 3이었다. 이는 인간이 얼마나 보편적 진실보다 사회적 평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험이다.
이렇듯 개인은 보편적 진리와 상관없이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 영향을 받기 쉬우며 때때로는 자신의 속해있는 집단의 정책과 믿음에 따라 개인이 고수해왔던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거나 무엇이 옳은것인가, 무엇이 진실인가의 판단 기준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동조 현상은 인간의 본능적인 특성이기에 현재에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브레인 게임 4>에서 진행한 간단한 실험을 보면, 아무런 의미 없이 행해지는 집단적 행동이 자연스럽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행동이 규칙이 되어 다시 새로운 구성원에게 이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실험에서는 ‘소리가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는다’라는 간단한 행동이 어떻게 하나의 규칙이 되는지 보여준다. 먼저 있던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특정 행동을 반복하면, 새로 들어온 구성원은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규칙을 그 사회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진실로 받아들여 동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행동의 이유는 사라지고, 동조하려는 본능만 남아 그것이 진실이자 사회적 규칙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진실로 여기는 것들,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들 중 몇몇은 그냥 우연히 시작된 집단행동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본능적인 동조 때문에 무엇이 정당한 규칙이고 무엇이 비합리적인 규칙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실험을 통해, 우리가 믿는 규칙과 진실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흐려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진실의 왜곡행위를 애석하게도 멈출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정보통신기술을 만나면서 더욱, 진실의 대한 왜곡은 다양한 방면으로 가속화 되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 그리고 지금의 시대를 거짓 선지자들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