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요즘이다. 이제 AI는 단순한 기술적 도구를 넘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할지 학문과 일상 전반에 걸친 현실적인 고민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한복판에서, 디자인 철학자인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은 그의 저서 『디자인 특강』을 통해 인간과 기계, 그리고 미래 AI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던져준다. 특히 그가 인간의 인지 과정과 행동 방식을 깊이 탐구해 왔다는 사실은, 기술의 압도적인 발전 속도에 가려져 있던 '인간 본연의 사고방식과 맥락'을 다시금 주목하게 만든다. 그의 시각을 빌려 근본적인 도구와 인간의 관계를 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나의 생각을 덧붙여 정리해 본다.
도널드 노먼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우리는 사람이 하는 조언보다 기계의 지시를 더 맹신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조수석에 앉은 가족의 길 안내에는 "그 길이 확실해?"라며 의심하고 고집을 부리지만, 자동차 내비게이션의 음성에는 아무런 비판 없이 운전대를 꺾는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사람에게는 화를 내면서도, 기계가 안내를 잘못하면 그저 시스템의 오류나 나의 조작 실수로 치부하며 순응해버리곤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계를 모시고 사는 수준에 이르렀다. 책에 실린 다음의 문장은 이러한 우리의 뼈아픈 현실을 매우 날카롭게 꼬집는다.
"우리는 우리의 도구를 모실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충실히 사용해야 한다. 또한 유지보수 작업을 하고 손질하고 편안하게 해줘야 하며, 우리를 이끄는 경우까지도 그들의 지시사항을 따라야 한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우리는 더 이상 기술이라는 도구 없이는 활기차게 살기 어렵다."
우리는 도구를 편하게 쓰기 위해 만들었다고 믿지만, 도구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순간 인간이 도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가 인간의 삶을 통제하는 주객전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소통 구조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은 양방향적이라 서로 의견을 교류하며 타협할 수 있는 존재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기계는 변하지 않는 '자신의 시스템과 규칙'을 가지고 있는 철저히 단방향적인 존재다. 결국 아쉬운 쪽인 인간이 기계의 시스템과 언어에 맞춰야만 제대로 된 작동을 이끌어낼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인간은 기계 앞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채 약자의 포지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챗GPT와 같은 대화형 AI 시대가 도래한 지금은 이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었을까? 안타깝게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메시지를 던지고 AI가 창의적인 답변을 내놓는 과정을 보며, 우리는 기계와 대등한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우리는 여전히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이름 아래 AI의 입력 방식과 알고리즘 규칙에 우리 자신을 맞추고 있다.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AI가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질문을 정제하고 다듬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다. 즉, 소통의 형태만 양방향을 띨 뿐, 주도권의 비대칭성은 여전히 인간이 기계의 규칙에 종속되는 단방향성의 연장선에 있다.
설령 기술이 더 발전하여 AI가 정해진 틀을 벗어나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는 완벽한 자동화 시대가 온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기계는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맥락(Context)'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밖에서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귀가하는 주인을 위해, 입력된 임무에만 충실한 자동화 가사 로봇이 식탁 가득 저녁을 차려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주인은 로봇의 수고에 고마워하기보다, 남은 음식을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자신의 상황을 읽지 못하는 과잉 친절에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오히려 AI가 사용자의 일상에 깊이 관여할수록, 이러한 맥락의 엇갈림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게 된다.
인간 사이에서는 "오늘 밖에서 먹고 갈게"라는 일상적인 소통으로 해결될 일이지만, 기계와의 관계에서는 이것이 단순한 '명령'과 '설정'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기술이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때로는 본인조차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고 모호한 인간의 유동적인 의도와 맥락을 기계가 스스로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수와 말: 새로운 지능과의 대화 방법
이러한 모호하고 불완전한 AI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도널드 노먼은 '기수와 말'이라는 훌륭한 비유를 제시한다. 말은 스스로 달릴 수 있는 강력한 힘과 야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수가 고삐를 통해 방향을 조정하고 세밀하게 제어할 때 비로소 훌륭하고 안전한 이동 수단이 된다.
AI 역시 말처럼 강력하고 자율적으로 작동하되, 인간은 기수처럼 그 동작을 원할 때 언제든 개입하고 제어하여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책에서는 이를 위해 '플레이북(Playbook)'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AI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어떤 데이터를 근거로 판단을 내리고 어떤 프로세스로 사고하는지 그 단계를 인간이 하나하나 투명하게 파악하고 제어할 수 있도록 돕는 인터랙션 설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기계와 기계 간의 데이터 동기화(Sync)는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기계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의도를 지닌 인간'을 동기화하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다. 따라서 기계는 자신이 예측한 가능성 안에서 인간이 현재 진정으로 원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끊임없이 묻고 확인해야 하며, 인간 역시 기계의 반응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의도를 전달하고 상태를 관리하는 '새로운 대화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단순한 기능 설정을 넘어, 기계와 인간이 유연하게 맥락을 조율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시대의 상호작용 방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 특강』은 단순히 기계와 어떻게 인터랙션할 것인가를 넘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 '디자인'이 수행해야 할 새로운 역할과 그 막중한 책임감을 역설한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이미 우리가 만든 도구의 편의성에 길들여져 도구를 모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인간과 AI의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더 이상 예쁘고 보기 좋은 물건을 만들거나 단순한 사용성만을 고민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복잡해지는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계를 통제하고 관리하며 궁극적인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편하게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지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설계해야 한다. 즉, 디자이너는 기계의 차갑고 단방향적인 규칙을 인간의 따뜻하고 복잡한 맥락으로 부드럽게 이어주는 '번역가'이자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술에 휘둘리지 않고 기술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 그리고 다가오는 AI 시대에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나아가야 할 미래 방향성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도널드 노먼의 이러한 날카로운 인터랙션 통찰에서 분명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