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대한 막대한 자본지출과 정부의 지원등으로 2025년 또 한번의 주식 시장의 상승장이 찾아왔다. AI기술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 기술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올해 코스피의 상승률이 S&P를 추월했다는 기쁜 소식(https://www.mt.co.kr/stock/2026/05/07/2026050713510715900)도 있을 만큼 주식시장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다. 어딜가나 주식이야기를 하며 국민 모두가 투자자가 된 것 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전 국민적인 투자 열풍은 단순히 개인의 자산 증식 목적을 넘어, 대중의 낙관적 전망이 시장의 실효성 있는 동력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수많은 대중의 참여로 형성된 거대한 자본의 흐름은 이제 특정 기술의 운명과 기업의 성장을 좌우하는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즉, 시장을 향한 뜨거운 관심이 기술 혁신을 완성할 거대한 재원으로 치환되는 전환점에 들어선 것이다.
투자자들은 AI를 통해 펼쳐질 새로운 세상과 발전을 기대하며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 투입된 자본은 회사의 주가를 상승시키고 주가의 상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회사의 현금자본흐름과 투자, 대출등을 유리한 조건으로 실행시킬 수 있도록 만들고 더욱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이렇듯 주식투자가 보여주는 자본의 선순환이야 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부론>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 개인의 이기적 경제활동이 사회전체의 이익과 경제적 효율성을 끌어올리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반면 이러한 금융경제의 성장은 나라의 빈부격차를 키우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격차는 자본시장의 필연적인 존재이다. 첫번째로 금융시장내에서도 격차가 발생한다. 특히 이번 2025년에 급등한 주식들은 모두 AI기술 기반이 있는 테크기업들들을 중심으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 두번째로 국내의 빈부격차를 키운다. 자본/자산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않는 자 간의 격차가 커지며 화폐가 만들어내는 인플레이션 덕분에 시간이 지날 수록 자산/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의 경제 생활은 힘들어져간다. 마지막으로 국가간 기술독점과 빈부격차도 커져간다. 주식시장이 없는 국가들, 있어도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는 국가들이 과반수다.
또한 모든 나라에 이러한 주식시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자본의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가난한 나라들도 있다는 것이다. 투자과정이 없어 경제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경제발전이 없기에 투자가 안일어나는 악순환의 연속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속 밀리의 서재에서 우연히 만난 책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을 리뷰한다. 책의 제목에서의 질문은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내가 읽었던 책 《팩트풀니스》 에서는 세상의 긍정적인 면과 빈곤의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지적하며 팩트로서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였기 때문에 두 책의 상반된 주장에 이끌려서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를 보게 되었다.
세계와 가난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세계’와 ‘가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세계와 가난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모습과는 꽤 다르다.
첫째로, 저자가 말하는 ‘세계’는 단순한 지구촌이나 국가들의 모임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의미한다. 저자는 이 거대한 체제 속에 숨겨진 불평등을 사회주의자의 시선으로 날카롭게 지적한다.
둘째로, 저자가 정의하는 ‘가난’ 역시 통계적인 수치나 남들보다 조금 덜 버는 상대적 빈곤이 아니다. 그가 유엔(UN) 자문위원으로 일하며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오늘 당장 먹을 음식이 없어 실제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현실, 즉 생존이 걸린 절대적인 빈곤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가혹한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게을러서? 올바른 정치 문화를 만들 혁명을 못했기 때문에?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다소 허무하면서도 뼈아픈 답을 내놓는다. 가난의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해, 바로 “운이 없음”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운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죽는 사람들을 저자는 지켜봐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환경이 열악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지는 착취적인 구조의 희생양이 되는 현실은 참혹하다. 이 시스템 속에서 가난한 나라의 자원은 헐값에 팔려 나가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보장받지 못한다. 결국 이들에게 가난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적인 덫인 셈이다.
합법적 약탈과 구조적 모순: 개인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착취적 성향을 가진다. 예전과 같이 식민지를 만들거나 노예를 만들어서 착취하지 않는다. 현대시대의 착취는 보다 심리적으로 도덕적이며 법률적으로 정의로운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자본적 착취를 만들어간다. 대표적인 방식들은 다음과 같다. 부유한 자본국가의 기업들은 제3세계에 진출해 현지 기업을 차리고 그들의 천연자원을 헐값에 발굴하여 독점한다. 개발도상국의 노동력과 자원은 고스란히 선진국의 부를 축적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또한, 이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마저도 세율이 낮은 국가(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탈세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환원을 교묘히 회피한다.
그렇다면? 그런 악의적인 수법으로 제3세계의 국가들을 탈취하고, 조세를 회피하는 기업들을 처벌함으로서 자본주의를 보강할 수 있지 않냐? 라는 궁금증이 생길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부조리는 단순히 특정 기업의 수장이나 개개인의 도덕적 타락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로서 기업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기업은 오직 '이윤 극대화'와 '주주 가치 제고'라는 규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게임의 규칙 자체가 약탈적 속성을 띠고 있기에 개별기업을 처벌해도 다른 기업이 나타나거나 다른 국가의 기업이 등장해 자국의 이익을 빼앗아가는 결과로 도달할 것이 뻔하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화폐 지배의 유구한 역사
현대의 거대 기업들이 국가의 통제마저 무색하게 만들며 전 세계를 무대로 이토록 막강한 '합법적 약탈'을 벌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그들이 쥔 '자본'이 단순한 돈을 넘어, 국가의 주권마저 흔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강력한 자본 권력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탄생 이전에 존재했던 화폐와 채권의 유구한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현대에는 흔히 자본을 상인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책 《금융의 역사》에 따르면 본래 화폐는 시장의 자생적 교환 수단이 아니라 영토 내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고안해 낸 국가와 왕의 절대적인 무기였다. 왕들은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오직 자신이 발행한 법정 화폐로만 납부하게 강제함으로써, 백성들의 경제 활동을 통제하고 국가라는 권력 아래 묶어둘 수 있었다. 즉, 화폐의 본질은 탄생부터 곧 '권력' 그 자체였던 셈이다.
과거 왕들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고, 이 채무를 갚지 못하거나 갚기 싫어질 때면 오히려 돈을 빌려준 상인을 반역죄 등으로 처형해 빚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화폐라는 권력을 독점한 왕 앞에서 상인의 목숨과 재산은 한낱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했다.
이에 생존의 위협을 느낀 상인들은 왕의 변덕스러운 폭력으로부터 목숨과 자본을 지켜내기 위해 머리를 맞댔고, 그 결과 탄생한 위대한 금융 혁신이 바로 '채권(Sovereign Bond)'이었다. 국가의 채무를 잘게 쪼개어 다른 사람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위험을 분산시킨 것이다. 채권의 주인이 수많은 사람으로 분산되자 왕은 더 이상 특정 상인 한 명을 처형하는 방식으로 채무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즉, 산업혁명 이전까지 채권이란 상인 계급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야만적인 왕의 권력 앞에서 가까스로 목숨과 부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한 '안전한 방패(생존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19세기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기폭제를 맞이하면서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오랜 시간 안전하게 축적되고 보존되어 온 상인 계급의 자본은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기회를 만나 폭발적으로 팽창했고, 이들은 공장과 기계라는 생산수단까지 독점하며 사회의 새로운 지배 계급(부르주아)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과거 왕들이 독점했던 무소불위의 통제권과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이 고스란히 상인 계급의 손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방패에 불과했던 자본이 마침내 왕의 왕관을 빼앗아 세상을 지배하고 짓누르는 강력한 권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결국 산업혁명기 자본가들의 가혹한 노동 착취는 이러한 역사적 변곡점을 거치며 비대해진 상인 계급의 권력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루 14~16시간 동안 쇠사슬 같은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이 불합리한 체제의 정체를 명확히 규명할 단어가 필요했다. 이러한 갈증 속에서 자본가에 대항해 노동자의 단결과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산주의'가 대척점으로 먼저 깃발을 들었고, 이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격돌 과정에서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상을 '자본주의'라 규정하는 명확한 틀이 탄생했다. 즉, 공산주의라는 강력한 대안의 등장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거대한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명확한 개념으로 정립되게 된 것이다.
멈출 수 없는 폭주: '없는 돈'이 강제하는 무한 성장
과거 상인들이 왕의 폭력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안했던 '채권'은, 오늘날 현대 국가와 은행 시스템을 옥죄는 거대한 '부채 엔진'으로 진화했다. 자본주의 화폐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이 부채, 즉 실물 자산 없이 신용으로만 팽창하는 '존재하지 않는 돈'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은행이 돈을 발행하고 유통하는 지급준비금 제도(Fractional Reserve)를 들여다보면 이 시스템의 기형성이 더 명확해진다. 흔히 은행이 자기 돈으로 대출을 해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은행은 고객(개인)의 예금을 유치하는 순간 '언제든 돌려주어야 할 빚(부채)'을 지게 된다. 은행은 이 개인에게 진 빚 중 아주 최소한의 법정 비율(지급준비금)만 창고에 남겨둔 채, 나머지 돈을 타인에게 다시 대출로 돌려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신용 화폐를 무한히 창조해 낸다.
결국 시중에 도는 화폐의 본질은 "은행이 개인에게 진 빚"인 동시에, "누군가가 은행에 갚아야 할 또 다른 부채"의 연쇄 사슬인 것이다. 이 파국적인 구조가 붕괴하지 않으려면 매해 엄청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애초에 시중에는 원금만 존재할 뿐, 이자만큼의 실물 화폐는 발행되지 않았으므로 이 누적되는 이자를 갚으려면 계속해서 또 다른 누군가의 빚을 부추겨 더 많은 돈을 찍어내고 더 가파르게 시장을 무한히 성장시켜야 한다.
결국 이 이자 구렁텅이를 지탱하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영토를 넓히며, 끊임없이 무한히 성장할 것을 강요당한다. 단 한 순간이라도 성장을 멈추는 날에는 빚더미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전 세계 신용 시스템 전체가 순식간에 붕괴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무한히 폭주하려는 성향은 인간의 멈출 수 없는 탐욕 때문만은 아니다. '빚'이라는 부채 엔진으로 설계된 이 기형적인 시스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구조적 생존 투쟁'의 일면도 있다.
저자의 자본주의 극복의 요구 그리고 자본주의 그대로도 괜찮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는 부채라는 시한폭탄을 돌려막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마치 도살장 입구에 선 가축처럼, 언젠가 금융 붕괴가 닥쳐올 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순번을 대기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 기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체제를 전복하는 봉기를 통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꿔야 하는가?
흥미롭게도 책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가 제시하는 극복의 길은, 필자가 앞서 짚어본 금융·화폐사적 분석보다는 사회적 봉기와 시민 연대, 그리고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강력한 요구에 가깝다. 비록 저자 역시 자본주의를 완벽히 대체할 구체적인 대안 체제를 명쾌하게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화폐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겨낼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고 누구도 쉽게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언젠가는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세상이 평화로워 질것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이야기 하지만 한스로슬링의 <팩트풀니스>스는 이미 우리 세계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기반으로도 충분히 나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스 로슬링은 국가의 소득 수준을 4단계로 제시했는데 1단계 극빈층 2단계 신발을 신는 단계 3단계 수도꼭지가 있는 단계 4단계 우리가 사는 단계로 구분한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지난 수십년 간 수십억 명의 인구가 1단계에서 2, 3단계로 이동해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팩트풀니스의 이러한 주장도 자본주의가 가지고오는 빈부격차의 대한 해답은 내려주지 못한다. 3단계와 4단계의 차이는 막대하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속에서도 그러한 빈부격차는 해소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소수의 자산가가 다수 서민의 재산을 합친것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의 저자 장지글러의 주장이 모두 맞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저자가 말하는 내국의 사회복지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주식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장 우리가 은퇴 후에 지급받아야 할 국민연금과 같은 노후 자금을 유지하고 불리기 위해서는 더더욱 주식시장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개인이든 국가를 통해서든, 주식시장에 단돈 100원이라도 넣었다면 우리는 자본가로서 자본시장에 참여한 시스템의 일원이 된 셈이다. 나의 안락한 노후와 국가 복지 혜택의 밑바탕에는 제3세계의 자원 수탈과 노동 착취가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 복지라는 선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원치 않게 자본시장의 억압받는 구조를 강화하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구조적 공범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다국적 기업들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해외 개발도상국에 공장을 건설하는 행위를 지나치게 일방적인 ‘탈취’와 ‘약탈’로만 규정한다. 과연 제3세계 국가 입장에서 자본의 유입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착취에 불과한 것일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록 기업의 목적이 비용 절감에 있을지라도, 공장이 설립됨으로써 현지 주민들에게 대규모 일자리가 제공되고, 기술이 이전되며, 인프라가 구축되는 등 해당 국가가 실질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 또한 발생한다. 《팩트풀니스》가 지적하는 절대적 빈곤율의 감소 이면에는 이러한 글로벌 분업 체계를 통한 낙수 효과가 기여한 바를 무시할 수 없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의 저자의 이러한 경제적 상호작용의 긍정적인 면을 외면하고 착취라는 단편적인 도식에만 집착한 점은 책의 분석적 깊이에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저자가 살아오면서 했던 유엔자문위원회의 숭고한일들로 현장에서 직접 가난해서 굶어죽은 아이들을 바라봐왔기에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굴레의 반복, 그리고 초월적 유토피아를 향한 질문
결국 우리는 정답을 찾기위해 끊임없지 질문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지배와 피지배, 팽창과 수탈의 시스템은 시대의 형태만 바꾼 채 늘 반복되어 왔다. 이 굴레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인류가 꿈꿔온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이 만든 제도 역시 매번 인간의 한계에 부딪혀 타락했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떠한가? 과학의 발전은 언제나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줬다. (환경은 파괴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과학기술은 이 끝없는 루프를 끊어줄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국가 권력의 화폐 독점과 통제에 저항하며 등장한 비트코인은 지배 수단으로서의 돈을 해체할 수 것인가. 인간의 노동과 지능의 한계를 넘어서는 AI는 우리를 착취와 종속의 구조로부터 해방해 줄 것인가. 어쩌면 이 기술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탈피하여 새로운 유토피아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이자, 우리를 지배 구조로부터 구원해 줄 새로운 주체일지 모른다.
실제로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의 삶을 분명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기아의 비율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극심한 위생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안전하게 생존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구조적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위대한 과학적 진보와는 무관하게, 인류가 세운 사회와 국가는 흥망성쇠, 즉 번영과 몰락, 그리고 재탄생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루프를 끊임없이 되풀이해 갈 뿐이다. 이는 자본시장이 거쳐온 몇 번의 대공황과 수많은 국가의 몰락을 되짚어본다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 격동적인 시대의 변화 속에서, 기술이 깔아놓은 세상을 온전히 딛고 살아내는 것은 시스템이 아닌 오롯이 개별 인간의 몫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대한 과학과 구조의 변화를 막연히 관망하기에 앞서, 자본주의를 대하는 스스로의 주체적 철학을 먼저 단단히 가다듬어야 한다. 이 굴레를 진정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완전하고 탐욕적인 '인간성 자체를 탈피'하여 한계를 초월하여 일종의 깨달음, 혹은 영성을 얻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을 이겨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균형 잡힌 시선과 마음의 시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개인의 철학
자본주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나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악'이라 규정하거나, 기어코 전복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할 투쟁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근간에는 인류 정착 사회가 필연적으로 수반한 '사유 재산'과 '화폐'라는 본연의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인간 삶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발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현재 시스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이대로 안주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빈부격차는 날로 극심해지고, 가난한 이들은 부를 맹목적으로 선망하며, 부자들은 더 큰 자본을 쫓는 과정에서 때때로 인간성을 상실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사회 전체를 바라볼 때, 이 시스템이 가진 어둠과 빛을 동시에 직시해야 한다. 인류 전체의 역사를 보면 절대적 극빈층은 분명히 줄어들고 있으나, 우리 내부의 빈부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중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독점과 그로 인한 악행은 준엄하게 경계해야 마땅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이룩해 낸 선행과 그들의 혁신적 서비스가 우리 삶에 가져다준 편리함에는 아낌없는 존경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진리는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이 아닌, 이러한 양극단 사이의 보편적인 균형, 즉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개개인으로서는 거대한 시스템에 영혼을 잠식당하기 전에, 나만의 '세계'와 '돈', 그리고 '가난'에 대해 내면에서부터 자신의 정의를 단단히 세울 필요 성이 있다. 자신의 욕구와 가난을 솔직히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마음의 시야'를 어디에 두느냐라는 본질적인 이야기가 핵심이 된다.
예컨대 관점에 따라 화폐의 질서가 자본주의가 삶을 지배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이미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속세와 떨어져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고유 부족들은 자본의 안락함은 없을지언정 그 속에서 고유한 자유와 주체적인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또한, 14억의 인구가 부촌과 거지촌을 단 10분 거리의 간격에 두고 공존하는 나라인 인도는 어떠한가. 그들은 눈앞의 빈부격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삶을 활기차게 살아내곤 한다. 그것은 그들이 부조리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삶을 가치 매기는 그들만의 '기준'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 나만의 온전한 기준이 부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률적인 기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우리는 남들보다 재산이 많은 것으로 피상적인 우월감을 느끼고, 나보다 부자인 사람들을 보며 억울해하거나 침울해지곤 한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겪는 가장 비극적인 가난은 물질의 결핍이 아니라, 내 삶의 가치를 스스로 매길 수 있는 고유한 기준을 상실해 버린 '주체성의 빈곤'인 셈이다.
에필로그: 내 안의 세계, 내 안의 가난
이제 처음 저자가 던졌던 질문,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로 다시 돌아와 나의 생각을 정리하며 이 글을 매듭지으려 한다. 저자가 던진 '세계'와 '가난'이라는 화두를 온전히 마주하기 위해, 나는 이 두 단어를 내 안에서 새롭게 정의해 보려 한다.
첫째, 내가 정의하는 '세계'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지구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며 나의 고유한 시야로 해석하는 주관적인 터전이자 마음의 풍경이다. 거대한 우주는 단 하나로 존재할지언정, 우리가 실제로 숨 쉬고 체험하는 진짜 세계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개별적으로 창조되는 까닭이다.
둘째, 내가 정의하는 '가난' 역시 지갑 속 물리적인 잔고나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상대적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 채우지 못한 '욕망의 크기'만큼 깊어지는 빈틈의 깊이다. 소유한 것이 적어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짊어진 욕망의 무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기에 스스로 결핍을 선언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결국 이 두 가지 정의를 바탕으로 내가 도달한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내 안에서 새롭게 내린 이 두 가지 정의(세계와 가난)를 디딤돌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책의 첫 질문이었던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에 대한 진짜 해답에 도달할 수 있다.
객관적인 지표 속에서 '세계의 절대적 가난'이 실제로 나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끈질긴 덫인가에 대한 정답은 한스 로슬링과 장 지글러가 서로를 평행선처럼 비껴갔듯 영원히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지 모른다.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나 폭력적인 전복이라는 극단적 태도 역시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 진짜 진리는 이러한 양극단 사이의 보편적인 균형, 즉 그 중간 어딘가에 존재할 뿐이다.
그렇기에 전지구적 극복보다 앞서 개개인이 자본의 거대한 회오리 속에서 나만의 '세계'와 '돈', 그리고 '가난'을 주체적인 철학으로 정립하여 자신의 기준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바깥세상이 들이미는 끝없는 무한 성장의 규칙과 빚의 사슬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자본의 지배 질서에서 벗어나 삶의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이유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타인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고, 불교의 가르침대로 삼라만상의 덧없음을 마주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니체의 말처럼 끝없는 자기극복을 통해 비극적인 운명마저 긍정하는 초인(Übermensch)이 되어 우뚝 서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이 거대한 악순환, 즉 '세계의 가난'을 극복하는 마지막 열쇠 역시 국가나 거대한 제도의 혁신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롯이 우리 개개인의 내면적 도약과 주체성 회복에 달려 있다. 이처럼 깊고 단단한 마음의 시야를 가질 때, 우리는 빚의 사슬로 가득한 냉혹한 자본주의의 한가운데서도 결코 흔들리거나 결핍되지 않는 '진정으로 풍요로운 나만의 세계'를 마침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