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친구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친구는 이 책이 자신의 '인생 책'이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고, 꼭 읽어보기를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밀리의 서재에 올라오면 볼게"라며 차일피일 미루었으나, 결국 내 미온적인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친구는 카카오 선물하기를 통해 내 손에 책을 직접 쥐여주었다. 타인의 인생이 담긴 책을 직접 선물까지 받았으니, 나로서도 정성스럽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퇴근 후 집에서 한 시간씩 읽어 내려가던 이야기는 중반부에 접어들자 무서운 속도로 나를 빨아들였다. 결국 카페로 향해 세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끝까지 읽어버렸다. 특별히 서사 구조가 기발하거나 자극적인 사건이 터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인물의 내면과 상황을 그려내는 하루키 특유의 묘사들이 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 아니었나 싶다.
읽는 도중 친구에게 "이거 사실 야설 아니냐"며 중간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지루해질 법하면 등장하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 때문이었는데, 사실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과장해 말한 것일 뿐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등장하고, 인물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상실하는 과정을 겪는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그 상실의 고통을 섹스라는 행위로 극복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대체 무엇을 위해 쓰였는가? 죽음의 허무함인가, 아니면 사랑의 본질인가? 보통 인문학이나 철학 책을 읽으면 메시지가 뚜렷해 금방 리뷰를 쓰곤 했는데, 이 책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허무주의의 기록이다. 내가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이유는, 평소 로맨스 장르를 즐기지 않을뿐더러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 중 나와 기질이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캐릭터는 '나가사와' 선배였다. 물론 그처럼 매일 밤 새로운 여자와 관계를 맺지는 않지만, 그가 사랑을 대하는 방식, 그의 사랑의 정의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모두가 열심히 살지만, 노력하며 살지는 않는다”는 그의 대사처럼, 그는 세상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다른 여자를 찾는 그에게 관계는 일종의 게임과 같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른다. 사랑과 욕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무엇을 사랑이라 정의할 것인가? 세상이 말하는 보편적인 정의는 있겠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와닿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항상 연애를 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연애하지 않는 삶을 실패자처럼 취급하거나, 청춘을 낭비하고 있다고 힐난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나는 그들이 말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그것이 내가 타인의 사랑을 관찰하며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결합이 사랑이라면, 대상은 굳이 '그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인간이 사랑에 빠지는 도식적인 절차를 살펴보면 그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첫째 주변에 존재할 것, 둘째 외관이 마음에 들 것, 셋째 공감대를 통해 타자(他者)를 나로 받아들일 것, 넷째 육체적 관계를 통해 그 일체감을 완성하는 것. 특히 섹스 도중 타자의 쾌감이 나의 것으로 전이되는 순간, 뇌는 이미 너와 나의 구분을 지우고 타자를 '나'로 인지한다.
결국 조건만 갖춰진다면 사랑은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면 사랑이 특별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불륜이 흔한 세상은 사랑의 특별함이 환상이라는 가장 강력한 반증이며, 연인이나 부부라는 관계는 그저 사회적 약속일 뿐이다.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과 안식을 주지 못한다.
인간이 그토록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한 생존 전략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물체는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에 불과하며, 사랑이라는 숭고한 포장지는 결국 번식과 종족 보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이 모든 과정이 나에게는 지독히 부자연스럽고, 그저 본능적인 욕구로만 느껴진다.
나의 삶을 돌아봐도 관계나 사랑은 항상 뒷순위였다. 만화가라는 꿈을 꾸면서도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기 위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했고, 중학생 때부터 이미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퇴근 후 그림을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대학 생활을 해내고, 이제는 시나리오를 쓰고 책을 읽으며 무언가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 그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사랑에서 도태되었다.
어쩌면 나는 욕구와 사랑을 철저히 구분 지으려는 지적 허영심에 빠진 순수하고 어리숙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영역을 명확히 분리하려 드는 기질은 소설 속 나가사와와 꼭 닮아 있다. 다만 나가사와가 타인의 사랑에 대해 재단을 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나는 타인들이 말하는 사랑을 그저 본능적 욕구일 뿐이라 치부하고 있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그들은 어떤 온도로 타자를 받아들이는지 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아마 하루키 작가 역시 이런 개인적인 냉소와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타인의 다양한 정의들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 소설을 써 내려갔을 것이다. 소설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사랑에 대한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사랑이란 타인의 잣대가 아닌 개인이 스스로 내재화하고 정의 내려야 하는 영역이며, 그 누구도 대신 가르쳐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2주가 지나서야 찾아온 이 감정의 정체는 결국 '막막함'이었다. 사랑은 특별하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는 숲과 같다. 나는 지금 그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서 있다. 정조의 관념도, 숭고한 가치도 깨부수어진 그 허무한 숲속에서, 나는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해 글을 써본다. 사랑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모른다는 사실만큼은 이제 명확해졌다.